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워런 G. 하딩 (문단 편집) === 대통령 당선 과정 === 1920년 미국 대통령 선거는 각종 조사 및 예측에 따르면 (전임 대통령인 [[우드로 윌슨]]의 삽질 등 여러 이유로 인해) 공화당의 집권이 확실해진 상황이었다. 이때 공화당 내부에서는 당내 파벌끼리 자기네들끼리 해먹겠다고 난리를 쳤는데, 그래도 결정이 나지 않자 당원 투표를 하기로 했다. 그런데 이 때 '''9번'''이나 투표를 했는데도 공화당 대통령 후보가 결정되지 않았다. 그래서 지칠 대로 지친 계파 대표들이 모두 합의해서 '''"이렇게 싸우기만 할 바에 그냥 우리 모두가 쌈싸먹을 수 있을 만큼 호락호락한 [[호구(유행어)|사람]]을 적당히 골라서 선거에 내보내자."'''라는 취지로 뽑아준 사람이 하딩이었다.[* 선거가 박빙으로 예측되었다면 끝장을 봐서라도 누구 하나를 내세웠을지 모르나 1920년의 선거는 좀 달라서 공화당으로 정권이 넘어올것이 거의 확실시되는 상황이었다. 이러니 이런 별 특징도 능력도 없는 인간을 내세울 여유를 부릴 수 있었을 것이다.] 이 결정이 날 때 하도 사람들이 [[시가(담배)|시가]]를 펴 대는 바람에 그 방이 시가 연기로 매우 자욱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Smoke-filled room'(시가 연기로 꽉 찬 방)으로 유명하다. 부통령 후보는 첫판에 [[캘빈 쿨리지]]로 결정됐으나 대통령 후보는 아무리 투표를 해도 결판이 안 났던 것이다. 하딩은 처음에는 공화당 대선 후보로 나오지도 않았으나 당내 계파 중진들에 의해 흔히 말하는 경선 “들러리” 역할로 당내 경선에라도 출마하라고 압박을 받았다. 그래서 하딩이 출마를 했으며 원래 경선 캠프도 차리지 않았을 정도. 당시 공화당 경선에서 최유력 후보는 레너드 우드(Leonard Wood, 1860 ~ 1927) 장군, 프랭크 로덴(Frank Orren Lowden, 1861 ~ 1943) 일리노이 주지사, 하이럼 존슨(Hiram Johnson, 1866 ~ 1945) 상원의원 3명이었다. 계속 투표를 했는데도 우드, 로덴, 존슨이 과반수를 차지하지 못하자 계파 수장들이 모여서 최하위였던 하딩을 뽑기로 하고 우드 쪽 대의원들(사실상 군인 표)을 제외한 나머지 대의원들이 모조리 하딩을 찍어서 갑자기 8차 투표에서 하딩이 선두로 치고 나오고 9차 때 나머지 후보들이 사퇴하는 형식으로 하딩이 대선후보로 선출된 것이다. [[192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하딩-쿨리지 조의 상대 후보는 [[민주당(미국)|민주당]] 제임스 M. 콕스-[[프랭클린 루스벨트]] 조였다. 1920년 대선 출마자 중에서 콕스를 뺀 하딩, 쿨리지, 루스벨트는 대선에서 당선돼 대통령직을 해봤다. 사실 [[전당대회]] 막장은 민주당이 더 했는데, '''1920년 민주당 대선 후보 지명대회는 무려 44번이나 투표를 한 끝에 콕스로 결정났기 때문이다'''. 공화당은 '''고작 9번''' 투표였는데 공화당과 마찬가지로 민주당은 부통령 후보는 루스벨트로 빨리 당첨됐으나 대통령 후보는 양보하는 사람이 없어서 투표가 반복됐다. 원래 민주당 후보로는 [[우드로 윌슨]] 정권에서 재무장관을 지낸 윌리엄 깁스 매커두(William Gibbs McAdoo, 1863 ~ 1941)가 가장 유력했으나 '''38차 투표'''에서 콕스로 역전되어 콕스가 후보로 뽑혔다. 하딩의 선거공약이 "정상 정치로의 복귀"(Return to Normalcy)[* 하딩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하딩이 워낙 무식한 자라 normal의 명사형인 normality도 몰라 normalcy라는 명사를 창조(!)했다고 욕했다. 하지만 normalcy는 거의 쓰이진 않았어도 그 이전에도 normality의 동의어였다.(출처: Lies, myths and cherished history in American history)] 였다. 윌슨의 다소 개방적인 외교정책과 [[제1차 세계 대전]]에 진절머리가 난 미국을 "정상 상태"로 되돌리겠다는 이야기. 대표적인 고립주의 공약이라고 할 수 있는데, 너무 복귀한 나머지 "아무런 업적도 남기지 못했다"고 볼 수도 있다. 하딩은 [[1920년]] 대선에서 '''무려 1천 6백만표(60.3%)'''라는 경이로운 득표율을 보였는데 이는 [[토머스 제퍼슨]]이나 [[제임스 먼로]] 이후 최대이며, 바로 직전 윌슨 대통령의 표(약 9백만표)의 1.7배로, 이 기록은 60.8%를 받은 [[프랭클린 D. 루스벨트]]([[1936년]])까지 깨지지 않았다. 이후엔 [[린든 B. 존슨]]의 61.1%([[1964년]]), [[리처드 닉슨]]의 60.7%([[1972년]]) 등의 기록이 있지만 이건 모두 '''신임받은 재선 대통령으로서의 득표였다.''' 즉, 초선에 [[갑툭튀]]한 인물에게 몰아준 케이스는 이 경우가 유일하다. 하딩의 1920년 대선은 미국 역사상 가장 많은 신규 유권자가 생긴 대선이기도 하다. 바로 수정헌법 19조로 주어진 '''여성 참정권''' 때문. 유권자가 3,009만명에서 5,440만명으로 1.8배, 거의 배로 증가했다.[* 반면 투표율은 61.6%에서 49.2%로 과반이 안되게 급감했는데, 그래봐야 총 투표수가 1,853만명에서 2,675만명으로 44%나 증가했다.][* 반면 이 시기는 미국 역사에서 정치적 관심이 줄어들던 시기와 일치한다. 독립 초에 30% 미만이었다가 앤드루 잭슨 이후로 50%대, 19세기 중후반만 해도 70% 중후반에서 80% 전반까지 나오던 대선 투표율은 쿨리지가 출마한 다음번 1924년 선거에서 48.9%로 바닥을 찍는다. (물론 아직 참정권 초기로 여성의 투표율이 낮았던 탓도 있다.) 하지만 이후로 회복하여 20세기 중후반 동안 50~60% 초반을 오가게 된다. 다시 50% 밑으로 내려간 건 [[1996년 미국 대통령 선거]](49.0%)로, [[빌 클린턴]]의 재선 선거였고, 다시 50~60% 초반으로 오늘에 이른다.] 더불어 1920년 첫 라디오 정규방송이 1920년 선거 개표방송이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미국 미디어 역사에 의외로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